로맨스 야설

부부 일기 - 에필로그

밤고수 0 1,462 05.23 09:42
에필로그 - 친구의 일기




12월 5일




어제, 성혜 씨와 첫 관계를 가졌다. 끝내 사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절정의 순간에 동철이가 생각나서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한 원망도 한몫 거들었다. 아무리 동철이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지만, 그건 핑계조차 되지 못한다.


십 여 년에 걸친 짝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눈이 멀어, 그저 내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했다. 죽어가는 동철이의 마지막 소원을 나는 비열하게 이용한 셈이다.




몇 달 후면 동철이의 고단한 삶이 마감된다. 아내 모르게 죽고 싶다는, 악인으로 기억되게 해 달라는, 자신을 대신해 성혜 씨와 민아를 보살펴달라는 간청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판단인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12월 9일




어둠이 깔린 뒤숭숭한 시간, 창 밖으로 겨울비가 흩날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모양새가 괜히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동철이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완도의 농가는 지내기 편할까? 급하게 마련하는 바람에 제대로 보수조차 못했는데……


자동차 사고로 위장해 달라고 했던가? 술집 아가씨와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린다, 며칠 살지도 못하고 헤어진다, 돈도 날리고 직장도 날리고 술로 지샌다, 결국 음주운전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는 게 동철이가 각색한 시나리오의 전부다.




그래야 성혜 씨가 편해진다며 아이처럼 헤벌쭉 미소 짓던 동철이……


[진수, 사랑하는 내 친구야!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 꼭 들어줄 거지?]


[…… 그래!]


[아이들의 좋은 아빠가 되겠다는 약속, 잊으면 안 돼! 나중에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그 은혜, 반드시 갚을게!]


[아이들이라니……?]


늦은 귀가를 재촉하는 차량들의 소음에 묻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전화기를 귀 가까이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렇게 지우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 결국 네게 짐 하나만 더 얹은 꼴이야! 그래도 잘 키워 주리라 믿어. 내 아기가 아니라 성혜의 아기니까 말이야!]


저녁 무렵 동철에게서 걸려온 한통의 전화. 사실, 그 때까지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민아 외에 한 아이가 더 있다는 것이 결코 부담스럽지는 않다. 다만 성혜 씨의 몸속으로 내 성기를 삽입하던 순간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빠…… 부탁이 있어요!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대하듯 살살, 부드럽게 해 줘요.]


[절, 헤픈 여자라고 손가락질해도 좋아요. 그렇지만 저도 살아야겠어요! 이렇게 안겨 있지 않으면,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아요!]


성혜 씨는 타인의 품을 갈망하던 그 순간조차, 자기 자신을 버리던 그 순간조차, 태어날 2세와 함께였던 것이다. 아니, 남편인 동철이와 한 몸이었던 것이다.


천륜을 거역하려는 남편과 악착같이 지키려는 아내……


지금까지 나는 그들이 엮어가는 사랑의 방정식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독단과 독선에 치우친 무지몽매함의 극치였다.


어둠이 깔린 뒤숭숭한 시간처럼 너무 늦은 후회가 아니길…… 새벽이 짙어질수록 아침이 멀지 않았다는, 절망 속의 희망이 피어나길…… 간절히 기원한다.








12월 10일




외근 나오면서 성혜 씨의 친정집에 전화를 넣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순간의 전화였는지 모른다. 출근해도 일손이 잡히지 않는 것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성혜 씨를 위해, 아니 동철이를 위해서도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한결 홀가분해졌다.


카우소스 산 위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던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 가슴을 더욱 가혹하게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성혜 씨, 마침 직접 전화를 받으시네요.]


[누구……? 혹시 진수 씨?]


[네, 접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아니, 제가 지금 어딜 가려던 참이라…… 급한 용건이 아니라면 다음에……]




순간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있으랴 싶어 말끝을 흐리며 전화를 끊으려는 듯한 성혜 씨를 황급히 제지했다. 그때까지 나는 이혼을 결심한 성혜 씨가 변호사를 찾아가는 길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성혜 씨, 끊지 마세요! 몇 분이면 됩니다.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뭣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


[동철이, 동철이가 지금 아파요! 아주 많이 아파요!]


[…… 이제 와서 그게 어쨌다는 거죠? 왜, 죽을 정도로 아프다고 하던가요?]


정색하는 성혜 씨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나왔다. 나는 한 호흡을 쉰 다음,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상태로 이야기했다.


[그래요! 동철이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간암…… 말기입니다. 대략 석 달 가량 남아……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절제했던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지, 진…… 진수 씨! 지금 뭐라고 했나요? 누가 어쨌다는……?]


그 순간 쿵, 하는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실신했음을 직감하고 한 달음에 달려가 보니 역시 성혜 씨는 텅 빈 집의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응급차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성혜 씨가 나를 발견하고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허수아비 같이 푸석 마른 몸놀림이라 다시 눕히기는 쉬었다. 그러나 성혜 씨의 고집을 끝내 꺾을 수 없었다.


[가야 돼요! 제발…… 남편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줘요!]


성혜 씨의 억지에 밀려 응급차를 돌려 내 차로 갔다. 위급하다는 남편 소식에 정신을 잃었다고 설명하자 응급차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진수 씨, 휴대폰 좀……]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전화기를 건넸다. 차는 이미 톨게이틀 벗어나 완도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서너 시간 가까이 운전하며 나는 그 동안의 사건 전모를 들려주었다.


말 그대로 안전벨트에 의지해 몸을 가누고 있던 성혜 씨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엄마, 저예요! 시장은 잘 다녀왔어요? 민아는 어때요? 아, 응급차가 왔던 거요? 옆집에서 쓸데없이 알려줬나 보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것보다 오늘 못 들어갈 거야. 왜는……? 오랜만에 차 서방이랑 좋은 시간 보내려고 그러지!]


친정어머니가 뭐라고 다그쳤는지는 몰라도 성혜 씨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동철이가 요양하고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긴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붉게 번진 노을을 처량하게 바라보며 나는 외딴 농가 앞에 서 있었다. 동철이의 간병을 위해 붙여준 아가씨가 문밖으로 나오더니 발끝으로 돌멩이만 톡톡 건드렸다.


성혜 씨가 이혼을 결심할 정도로 지난 번 아파트에서 동철이와의 섹스 씬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던 장본인…… 영화판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어렵사리 물색한 단역 배우……


석 달에 천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했던 이유는 위암에 걸린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녀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는 후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큰 비밀을 공유했던 동지 의식이라도 발동했는지 나는 그녀의 발장난에 동참했다. 씨익,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노을이 내려 앉아 발갛게 물들어갔다.








3월 25일




완도의 밤은 눅눅하다. 바다에서 날려 온 찝찌름한 소금기가 아내의 푸석푸석한 얼굴에 흔적을 남겼다.


[힘들면 참지 마! 실컷 울어도 괜찮아.]


[그게 아니라,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 오늘이, 오늘이 가고 나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면서도 아내는 끝내 몇 방울의 눈물을 바다에 쓸려 보냈다. 동철의 유해가 뿌려진 그 바다……


동철의 기일에 맞춰 찾아온 완도의 농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적당히 빛이 바랜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동철이 평온하게 숨을 거둔 공간에서 나와 아내는 제사상을 물린 뒤, 살을 섞었다.


[여보! 오늘 같은 날, 이래야 돼?]


아내의 암팡진 계곡 사이에 내 성기를 집어넣으며 재차 물었다. 다른 날도 아닌 동철의 기일에 아내가 섹스를 요구하다니, 전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 사람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했어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참 가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알 것도 같아요.]


나는 허리 반동을 더욱 크게 하면서 아내의 촉촉한 눈망울을 내려보았다.


[혹시라도 삼년상을 할까봐, 그게 못 미더웠던 것이죠. 그 사람 죽자마자 6개월 만에 훌훌 털고 당신과 결혼했는데……]


[………]




무심한 듯 얘기한다고 해서 어찌 모르겠는가? 임종을 앞둔 동철이가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우리 둘의 손을 맞잡고 “해를 넘기지 마!”라고 당부하던 절박한 심정을……


[당신 몰래, 그 사람이 제게 그랬어요. “이승에서 뜨겁게 살라고, 샘이 나도록 아름답게 지내다 오라고, 저승에서 다시 만나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고…… 첫 기일이 되면 여기에서 사랑을 나눠달라고, 그러면 저승에서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노라고……]


아내는 동철이를 떠나보내기 위해 나와 섹스를 나눴던 것이다. 온전히 내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아내에게서 동철이의 그림자를 지울 생각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두 사람의 사랑을 갈취하고 싶지 않다. 동철이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저승에서 활짝 꽃피도록 물과 거름을 아낌없이 쏟아 부을 작정이다. 나는 그저 아내의 사랑을, 동철이의 사랑을 잠시 빌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적당하게 불어난 아내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며 펌프질의 속도를 높였다. 아내가 가쁜 숨을 내쉬며 손톱으로 등 언저리를 할퀴고 있었다.


[여보, 아…… 아항…… 보지를, 보지가 찢어지도록……]


천사처럼 순결한 아내의 입술이 지극히 자극적인 단어를 조합했다. 언젠가 동철이 쓴 컴퓨터 일기장에서 훔쳐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아…… 하응…… 여보, 이렇게 오래…… 보, 보지가 불타는 것 같아. 아흥…… 어떻게 해…… 더, 더 세게…… 한 번만 더 힘껏……]


아내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풀려 있었다. 아내는 벌써 두 번째 오르가슴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게, 그렇게 화려한 섹스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언제 깼는지 두 살 배기 아기가 커다란 눈망울을 말똥거리며 아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내와 친구의 분신이자 내 영혼의 더러운 찌꺼기를 제거해준 두 살 배기 내 아들, 홍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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