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야설

부부 일기 - 3부 2장

밤고수 0 840 05.23 09:42
3부 - 아내의 일기(4)




12월 4일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저녁 8시쯤에 집에서 보자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상상 밖의 어떤 끔찍한 일이 준비돼 있을지 막막했다.


안 가면 그만인데, 불안하고 초조했다. 긴 여행을 떠난다는 진수 씨의 말이 이명처럼 맴돌았다. 죽든 살든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붉게 물든 석양이 청승맞도록 아름다웠다.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약속보다 앞당겨 도착했다.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열쇠를 꺼내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남편의 구두와 함께 하이힐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여자의 육감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 순간 뒤돌아 나갔어야 했다. 썰렁한 거실을 지나 설거지 꺼리가 쌓여 있는 부엌을 본 것으로 남편의 무사함이 확인된 이상, 그냥 돌아서는 것이 옳았다.


안방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건, 순전히 오기 때문이었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여자 문제였기를 바라는 간절한 믿음에서였다. 남자의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니까……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니까……


내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해 보였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기다리면 언젠가는 돌아오는 바람이라니, 용서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최대한 소리 죽여 손잡이를 돌렸다. 침대 귀퉁이가 드러나고, 남편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나타났다. 남편의 엉덩이 힘줄이 씰룩거리고, 물결치듯 침대가 흔들렸다.


[언제 봐도 자기 젖통은 환상적이야. 코딱지 같은 마누라, 아니지 곧 뒈질 년과 비교하다니……]


[아흑…… 마누라는 언제 해치울 건데……?]


[으응, 이따가 8시쯤에 온다니까 그 때 약 먹이려고……]


[자기야, 조금만 더 힘껏 박아봐! …… 그런데, 발각되면 어떡해?]


[괜찮아! 어차피 자기랑 지방으로 튈 건데……]


[그렇다고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년은 죽어 마땅해! 씨발, 무정자증인 내가 어떻게 씨앗을 뿌려? 모르는 척 봐줬더니 또 애를 가졌다고 지랄하잖아!]




남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정자증이라니……? 내가 외도를 했다니……? 남편은 어쩌자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진짜인양 믿는 것일까?


왈칵 문을 열어 젖혔다. 이미 나는 내가 아니었다. 여자를 끌어들여 침실을 더럽히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의 씨앗마저 부정한 채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으로 살해 음모를 꾸미다니…… 극도의 분노가 치밀었다.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한창 행위 중이던 남편이 여자의 커다란 젖가슴에서 입술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남편의 비굴한 모습이 역겨웠다.


[당신, 이 시간에 어떻게……?]


조금 전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술집 아가씨가 분명해 보이는 천박한 화장술의 여자에게서 떨어지며 허둥지둥 옹송그렸다.




있는 힘껏 남편의 뺨을 후려쳤다. 미망에 사로잡혀 그나마 가슴 속에 간직해 두었던 마지막 연민의 정마저 거품처럼 사라졌다.


[기억해 둬! 뱃속의 아이, 절대 지우지 않을 거야. 당신이 뿌린 악마의 씨앗을 왜 지워? 평생을 두고 증오할 거야. 당신은 미워할 가치도 없는, 인간 쓰레기야!]


남편을 향해 저주의 맹세를 퍼부으며 나는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했던 ‘사랑’을 내던졌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라는 외피로 위장된 ‘집착’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발갛게 물든 손자국과 함께 옅은 미소가 번져 있는 남편의 옆모습을 보며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웃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한심해 더욱 크게 웃었다.


그렇게 실성한 듯 웃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예전에 교양 강의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지 싶다.






유난히 장난을 좋아하는 동승이 있었다. 여러 스님들이 회초리를 들어 타일렀지만, 동승의 장난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느 날 노승이 사찰 마당에 동그라미를 긋고는 동승에게 문제를 냈다.


[너는 이 동그라미 안에 있어도 안 되며, 또한 밖에 있어도 안 된다. 만약 네가 그럴 수 있다면, 아무도 너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동승은 득의만면한 웃음을 짓고는 문제를 풀었다. 한쪽 발은 동그라미 안에, 다른 한쪽은 동그라미 밖에 두었다. 그러나 정답이 아니었다.


동승은 다시 동그라미를 밟고 섰다. 그 역시 정답이 아니었다. 깡충 뛰어도 보고, 널빤지 위에 올라서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노승은 고개를 저었다.


몇 시간 째 전전긍긍하던 동승은 화가 나 벌컥 소리를 질렀다.


[스님! 그렇다면 답은 없습니다. 더 이상 스님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겠습니다.]


그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노승이 어린 제자에게 해답을 건넸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다. 노승은 원을 지워 버렸던 것이다.


큰 깨달음을 얻은 동승은 그 후 참선에 정진했다고 한다.






동승이 문제를 풀 수 없었던 이유는 ‘집착’에 있었다. 동그라미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와 그 동승이 뭐가 다른가? 남편이라는, 가정이라는 신기루에 대롱대롱 매달려 ‘손놓으면 안 돼!’라고 울부짖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 벗어나기 싫었던 것일까?


나는 새장 속에 갇혀버린 것처럼 점점 날개가 퇴화됐고,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묶여 함부로 비상을 꿈꾸지 못했다. 꿈꾸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며 진정 행복하다고 믿었다.


하나에 집착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집착하지 말자고 되뇌면서도, 집착을 버리자고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왜 이렇게 힘이 들까?




휘청거리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걸어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오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미치도록 억울했고, 죽기보다 서러웠다.


어둠이 깔린 놀이터의 벤치에서 검은 물체가 일어났다. 자석에 이끌리듯 나는 그 속으로 뛰어갔다. 무엇인가 붙잡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성혜 씨, 안심하세요. 이젠 괜찮아요!]




진수 씨였다. 사실, 진수 씨가 아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어디론가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기꺼이 동행했을 테니까……


진수 씨의 오피스텔에서 나는 12시간 이상을 잤다. 지난 밤, 나와 진수 씨는 서로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그의 침대에 눕자마자 스르륵 잠이 들었다.


팽팽한 활시위가 끊긴 것처럼 지나친 긴장감이 정신의 끈을 손쉽게 잘라버린 모양이었다. 머리맡의 자명종 시계를 10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실내가 밝은 것으로 한 밤중이 아님을 짐작했다.




깨어난 후에도 한 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일어났어요? 피곤하면 조금 더 자도록 해요!]


[충분히 잤어요. 또 신세를 졌네요. ……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사이를 띄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요리를 하고 있었는지 진수 씨는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었다.


[매번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진수 씨가 나타나는 군요. 아무려면 어때요? 이젠 다 끝난 일인데……]


[………]


[저 배고파요! 혹시 저 때문에 출근도 못하고 요리하신 거라면, 지금 먹고 싶어요.]




내가 생각해도 뻔뻔했다. 몸살을 앓듯 며칠을 끙끙거리는 게 후유증이 치료되는 당연한 과정이겠지만, 웬일인지 나는 대범해졌다.


오히려 길 가다 넘어진 정도로 털고 일어난 나를 진수 씨가 어려워했다.


[향이 좋은데, 무슨 요리에요?]


사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침울한 분위기가 싫어 둘러댔을 뿐이다.




진수 씨가 야채 죽을 내왔다. 혀가 깔끄러워 입맛이 없었다. 몇 술 억지로 뜨다말고 숟가락을 놓았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해요! 성혜 씨, 조금만 더 들어요.]


손수 숟가락을 집어 떠먹이는 것이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유부녀에게서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품지 않으려고, 주는 대로 씹지 않고 삼켰다.


개수대 한쪽에서 빈 그릇을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달그락거리는 그 소리가 푸근했다. 남편의 여자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부엌에 쌓인 그 많은 식기는 누가 설거지할까?




나는 남편을 용서하기로 했다. 아니,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둘 다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구실을 찾기로 했다.


개수대로 걸어가 진수 씨의 등을 뒤에서 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나는 진수 씨를 돌려세웠다. 그의 선한 눈망울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남편의 외도에 대해 진수 씨는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전부, 혹은 전혀…… 어느 쪽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발끝을 들어 진수 씨의 입술을 훔쳤다.


[화냥년이라고 욕해도 좋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손가락질 하지 마세요! 여기…… 여기가 터질 것처럼 쓰라려요!]




진수 씨의 손을 잡아 내 젖가슴에 갖다댔다. 머뭇거리며 빼내려는 손길을 꽉 붙들어 힘껏 눌렀다. 옷 위로 느껴지는 진수 씨의 손바닥이 야릇한 감흥을 불러왔다. 독으로써 독을 없앤다고 했던가? 짙게 드리운 불륜의 그늘이 죄의식을 무마시켰다.


[알아요! 우리 이러면 안 된다는 걸…… 그러니까, 그러니까 반드시 이래야 돼요.]


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횡설수설한다고 느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을 강하게 빨며 말문을 막았다.




나는 돌아서서 옷을 벗었다. 차마 벗는 모습까지는 보여줄 수 없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침대로 이끌었다.


차례차례 진수 씨의 알몸을 더듬었다. 축 늘어져 있던 진수 씨의 성기가 서서히 발기력을 회복했다.


음란 서적이나 테이프를 통해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남편 외에는 처음 대하는 실물이었다. 왜 그리도 정신은 또렷했는지, 그 순간 진수 씨의 남성이 꽤 튼실하다고 느꼈다. 남편의 지적대로 내 몸에 음탕한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닌지……?




생체 실험을 앞둔 마루타처럼 진수 씨의 사지가 심하게 요동쳤다.


[성혜 씨! 머리는 안 된다고 아우성인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우린, 후회할 거예요! 아니, 반드시 벌 받을 거예요!]


[나중에…… 나중에 후회해도 늦지 않아요! 오빠, 진수 오빠…… 오빠의 짝사랑을 이제 돌려주고 싶어요!]


진수 오빠…… 몇 년 만에 불러보는 호칭이었던가? 그 순간 나는 남편의 여자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부터 든든한 버팀목이 됐던 선배 오빠에게 맞바람을 피우기로 작정한, 부정한 유부녀였다. 그렇게 한 남자의 순정에 기대면서 무너지는 내 자신을 합리화했다.


알몸이 된 진수 씨가 내 위로 올라왔다. 차마 마주볼 용기가 없어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진수 씨의 아랫도리가 잔뜩 오므린 내 허벅지 부근에 닿았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지 머뭇거릴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무릎을 좌우로 벌려 진수 씨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 ‘살자,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서서히 진수 씨의 성기가 내부로 진입했다. 나는 헛바람을 삼키며 제2의 남성을 맞이했다.


[오빠…… 부탁이 있어요!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대하듯 살살, 부드럽게 해 줘요.]


순간, 진수 씨의 성기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진수 씨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힘껏 당겼다.


[절, 헤픈 여자라고 손가락질해도 좋아요. 그렇지만 저도 살아야겠어요! 이렇게 안겨 있지 않으면,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아요!]


불가항력의 올가미에 걸려든 먹이처럼 체념했기 때문일까? 진수 씨는 지극히 동물적인 교접을 계속했다. 젖가슴을 만지거나, 허리 밑으로 손을 넣는다거나, 깍지를 낀다거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등의 간단한 애무조차 없었다.




진수 씨는 무게를 싣지 않으려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운 뒤, 두 팔로 지탱하고 있었다. 진수 씨의 허리에 머무르던 양손이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으…… 우으……]


나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침대보를 말아 쥐었다. 싫지 않은, 묵직한 마찰음이 전신을 휘감았다.


[성혜 씨, 힘들어요? 지금이라도 그만둘까요?]


[아니…… 괜찮아요! 계속해줘요.]


진수 씨는 기교도, 애무도 없이 그저 돌진할 뿐이었다. 테크닉은 없었지만, 남편에 비해 굵고 단단했다. 마음만 활짝 열어놓았다면 몇 번이고 까무러칠 정도로 지속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길들여진 육체는, 더 이상 흥분되지 않았다.


옆집에 살다가 몇 달 전에 이사 간 새댁은 한 번 올라왔다 하면 드라마 한편은 기본이라며 신랑을 추켜세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무조건 오래 끈다고 좋은 것은 아닌데……’ 목구멍 깊숙이 말을 삼켰다.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잣대로 계산하자면 남편의 정력은 나를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오르가슴을 경험했던 건, 충분한 전희와 함께 마음으로 교감되는 애틋한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진수 씨의 섹스에 그런 감정은 없었다. 단순한 육체의 연습에 불과했다. 아랫도리에 번진 물기가 질퍽하게 흘러나와도, 침대보를 그러쥔 손아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도, 나는 오르가슴의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진수 씨 역시 분열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정에 이르지 못하는 기계적인 동작을 멈추고 내려왔다.


[미, 미안해요, 성혜 씨! 더 이상 제 자신을 속일 수 없어요…… 미안해요!]


진수 씨는 내가 할 말을 대신했다. 그렇다고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땀이 증발한 육신은 빠른 속도로 식어갔다.








12월 9일




내일 쯤 변호사를 선임할 생각이다. 이혼 서류를 꾸밀 때, 이것저것 생길 수 있는 잡음이 싫어서다. 이혼녀라는 딱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민아를 위해서도 이혼이 최선이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친정 부모님껜 죄송할 따름이지만, 당분간 비밀로 해야겠다. 충격을 덜 수 있는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면 그 때 말씀드려도 늦지 않을 테니까!


딸자식을 죽이려던 파렴치한이었다고, 사실대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미우나 고우나 사위인데, 처남 뒷바라지 마다않던 착한 사위인데……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지금으로선 막막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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